왜 사무친 고향일까?
산골에서 태어나 자연과 나뭇잎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하늘빛을 가슴에 품고 어머니의 사랑을 머금고 혈족을 알아보고 하나하나 마주치며 꿈을 키워 왔습니다.
나의 유년시절 지독하게도 춥고, 덮고 하루 새끼니 먹으면 운수대통이었던 우리 집. 이씨 조선 말까지만 해도 편안하고 넉넉했다던 고향의 산수화 꽃밭 지천인 땅. 일제만행과 육이오 마지막 빨치산이 죽은 운장산과 연석산자락 지리산. 피어린 소용돌이로 만경강 줄기가 핏물들로 얼룩졌습니다.
이제사 설법에 자자들고 줄기마다 호랑이가 살다가 모두 다 죽었다고 까막까치 떼들이 어서 오라 목이 쉬도록 울고 있습니다. 고향의 이름을 지으신 운장 송익필 선생님의 생전의 업적인 고향 이름입니다.
조선중엽 전국팔대 한시 시인이며. 예학, 성리학의 8대문장가 선생님의 우리들은 후손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람들 가슴마다 고향의 꿈동산이 자리 잡고 간직하며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계신다는 생각에 도시에서 고향인 시골로 찾아 들곤 했지요.
어느 덧 40여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가지를 못 했습니다. 신비스러운 하늘빛으로. <그리운 연석산> 나의 詩 한편이 그 큰 산 입구에 山門 詩碑가 되어, 어느 날 찾아 가보니 사무치게 그리운 고향의 사봉리 사람들과 서울에 향우회, 문우님들께서 산간오지 산골, 사라져가는 그 곳에 제막식을 하셨답니다.
한 번 떠난 그 자리로 가서 산다는 건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겠지요. 칠성대 봉우리에 사시다가 하늘로 가셨던 운장 송익필 선생님께서 축하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초교 6학년 때 책보를 둘러메고 도시로 혼자 가서 너라도 살아 남아라던 아버지. 어머니 열 식구를 키우려 밤낮 뼛골이 다 달아 빠지도록 살아남은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무슨 영문일까 책만 보면, 책상에 앉아 보면, 떠오르는 나의 시상들은 내가 살아가는 버팀목으로 나와 만난 부인 최미숙부부로 같은 곳을 향하여 30여 년 뒤를 돌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며 힘차게도 참 잘도 뛰었습니다.
낮엔 생업, 밤엔 책상에서 글을 써 오다가 부모님이 모두 하늘나라로 가신 보름 날 나의 꿈이 이루어지니 왜 그렇게 될 까요. 왜 그럴 까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하여 수십 년을, 한 번씩 12월이 오면 장학금을 서너 곳에 주면서 살아 왔습니다.
상을 많이 받을 법도 하다고요. 아닙니다. 단 한 쪼가리도 못 받고 살았습니다. 똥간에 빠진 어린아이를 맨손으로 꺼내어 살려 주고도 못 받았습니다. 늘 잘 한 일들이 있다고들 하지만 상 받고 상금 받고 떵떵거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을 테니까요.
― 연석 배학기, 책머리글 <시인의 말>
■ 배학기 시인
△裵學基. 필명 硯石
△한양대 대학원 졸업△《아시아서석문학》 등단
△한국문학예술, 시흥문인협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참여문학21 회원
△여성신문 논설위원. 각급 학교 문학(詩) 강의 20여 차례. 시흥신문·시흥자치신문·시흥주간신문·조선일보 특집기사 게재. ‘완주군을 빛낸 사람 3인’ 선정. 완주군 시평마을(연석산) 입구에 詩碑.
△《아시아서석문학》 공로상 수상
△시집 『그리운 연석산』, 『꿈꾸는 집』, 『나의 문학 나의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