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뒤뜰 배나무 가지가 까맣게 삭아 내리고 동구 밖 느티나무 둥치가 제 모습을 잃어갈수록 달구지와 화전에 젊음을 바친 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좋아졌다. 빈집만 늘어가는 고향 마을 고추밭에서 고추 대를 세우고 계실 아버지의 묵묵한 삶이, 아버지를 닮아 가는 내 삶의 부분들이 나를 자꾸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낙엽 위를 걷는 빗소리가, 방금 흙을 들어 올린 한 포기 풀이, 잠자는 나를 벌떡 벌떡 일으켜 세운다.
천둥소리로 계곡물소리로 내 가슴을 두드려놓고는 냉큼 달아나 버리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의 발목을 붙잡아서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시키고 싶다. 이 지구상에 오래오래 머물 수 있도록 든든한 집 한 채 지어주고 싶다. 나그네가 하룻밤 묵어가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집, 그런 집을 내 손으로 지어주고 싶다. 그 집이 빛을 발할 수 있을 때····· 아버지께서 옆에 계셨으면 좋겠다.
- 유순예, 시인의 말(책머리글) <단상(短想)> 중에서
■ 유순예 시인
△전북 진안 출생(1965)
△《시선》 ‘특별신인발굴’ 등단(2007)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하늘> 운영편집위원
△시집 『나비, 다녀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