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름은 낮에는 용광로 같고 밤에는 불가마 같아 잠을 설치게 하는 기염氣焰을 토하더니 어느덧 결실의 가을을 주고 사라졌다. 냉방 기구들이 바쁘게 돌아가는 공간에 황혼의 삶이 버거운 남편의 가까운 친구가 되어 허락되는 시간에 살아온 정거장에서 물러나지 않았던 추억들을 그려보았다.
역사를 간직한 성곽이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울타리 한쪽 면이 되었다. 걷기를 위한 행렬이 제법 이어진다. 성곽의 돌들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듯 변한 곳이 있어서 공공 관계 기관에서 직원이 나와 돌에 표시를 하고 사진을 찍는 흔적이 보인다. 마치 내 삶의 언저리에 성곽의 문제 석 같은 소리 없는 비명처럼 가끔 되돌아보는 삶이 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 듯 딛고 있는 땅이 요동을 치는 일본의 코베에는 사랑하는 제자인 가요코가 살고 있다. 외국이지만 마음속에 있으니 항상 가깝게 느껴지는 가요코와의 관계는 늘 푸르다. 공간 애가 담겨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코베는 지진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가요코에게는 구순이 넘은 노부모가 생존해 있다. 그녀에게 있어 치매를 앓는 시아버지는 천형天刑과도 같지만 그럼에도 모든 고난을 견디며 집에서 봉양을 하고 있다. 병원에 모시면 빨리 돌아가실 수 있다는 염려에서다. 무언의 교훈을 준다.
‘정신의 지진 같은 치매’와 ‘땅덩이의 지진’이라는 두 개의 축은 상호 동질적이다. 가요코는 천형 같은 일본의 지진의 숙명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미나 개원 특강에 강사로 지신밟기 형식으로 나를 초대한다. 난 이미 쿄토에서의 지진의 경험이라는 트라우마가 있다. 천지개벽의 재앙을 안고 있으면서도 나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일본 여인의 열려있는 마음이 나를 따뜻하게 한다. ‘흔들림에 초연한 여인’ 그 여인과의 긴 만남이 내 삶의 정거장에 머물고 있다.
몇 정거장을 지나오면 그리움이 잉태하는 개찰구에 서있다. 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언어 망을 직조하는 것이지 싶다. 지나버린 계절, 떠나온 고향, 사라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언어로 소생한다. 이렇게 체험과 상상의 접점에 공간 애는 모태를 중심으로 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남대천을 향해 가듯, 울화통의 시대를 살아내는 황혼에 이르러서도 이따금 그 남대천을 그리워하게 된다. 개찰구에서 머뭇거리다
습관처럼 개찰구를 통과한다. 머지않아 종착역이라 여기며 영원을 향한 길목 마다 문자의 향기를 피워 놓고 싶다. 읽히지 않는 책을 라면 끓인 냄비 받침이나 뜨거운 다리미 받침으로 쓰이는 사람들의 손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지 않을까. 오만이라고 나를 힐책하지만 그래도 함께 공감하는 사람이 만나지면 얼마나 좋을까. 기쁨이 넘칠 거야.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신 눈재 한상렬 교수님과 나의 멘토 석계 윤행원 문예춘추 이사님께 감사하며, 먼저 다른 세상에 가신 부모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가족과 제자들과 이 생에 교감한 지인들 특히 1권 《내 귀에 말 걸기》를 재독 삼독하시며 한없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전자책의 지평을 열어주신 문학방송 안재동 선생님께도 감사하고 싶다.
― 김은자 책머리글 <작가의 말>
● 김은자
△《에세이포레》 등단
△이화여대, 한양대, 동국대, 명지대, 시민대학, 강북정보문화대학, 불교방송국, 한국일보, 현대·삼성 문화센터 강사 역임
△일본 아시안핸드테라피협회 상임고문. 일본 코베․나가오카 출강
△불교자원봉사상 수상
△수필집 『내 귀에 말 걸기』,『침묵의 아우성 대학로』, 『가슴이 듣는 진혼곡』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