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죽었다는 시대에 서 있으면서 살아 있는 시인은 무엇인가.
그렇다고 이 시대가 아무 생각도 미련도 다 없어져 버렸는가.
계단을 아주 정확하게 오르는 첨단 로봇이 시를 잘 쓴다는 말은 아직 못 들어 봤다.
시를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소생의 기미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응급실로 가는 길바닥은 많이 막혀 있다. 뻔한 말로 시를 안 쓸려니 자꾸만 말문이 막히고. 그러한 시라도 써 보려니 로봇보다 뒤지는 느낌이 든다.
다만, 어눌하지만 숨찬 말소리가 울려나오는 곳에 살아 있는 운명의 시인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 김성열, 책머리글 <살아 있는 시인> 중에서
삼년 전, 문예지에 귀향일기란 제목으로 연재했던 31편과 그 동안 동인지 등에 실렸던 20편을 모아서 정리하고, 641행짜리 장시(농기) 한 편을 덧붙여서 한 권으로 엮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 해가 저물기 전에 묶어 내려고 서둘다 보니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만 같고. 뭔가 많이 빠진 둣한 아쉬운 여운이 남는다.
제1부 ‘그립자’ 편에는 영혼의 흔들림으로 너울거리는 영상들을 모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관념의 그 림자로 포장돼 있다. 정신추구의 관념시(patonic poetry)라 할 수 있다. 농기의 전설(1)은 제2시집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실었다. 유독 애착을 갖는 시편이므로 내는 시집마다 데리고 다닐까 한다.
제2부 ‘그리움’편에는 고향과 유년시절의 추억과 향수 가 깃들어 있고, 퇴직 후에 밀려오는 회오(懷悟)의 정서가 그리움으로 전도된 형상물들이다.
제3부 ‘노래하는 시인들’편에는 시인과 시에 관한 단 상을 모았고. 동인지에 발표했던 시조 5편을 함께 묶었
다. 제4부 ‘가올 시편’은 가을철 연재 시편들을 순서대로 배열했다.
제5부의 장시 ‘농기’는 여러 달 걸려서 어렵게 형상화 된 것이다. 내 운명의 형상물을 찾아서 구체화하기도 힘들었거니와 깊은 내면의 주관적인 의식(또는 무의식)을 최대한의 객관성을 부여하고 유지하려는 기법상의 문 제에 더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어차피 운명이란 관념의 세계에 떠도는 상징적 존재임으로 언어로 규정하거나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의 농기는 나와 관련된 운명의 모습들이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미완의 상태로 그냥 펄 릭이고 있을 뿐이다. 농기의 깃발이 내려질 때까지는 진솔한 삶의 모습 그대로 펄럭이는 생성의 울음소리로 이어질 것이고 그 운명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잡아 쓰는 일이 나의 시인 된 운명이기도 하다.- 김성열, 후기 <삶의 운명적 모습> 중에서
■ 山牛김성열(金性烈) 시인
△전북 남원(인월) 출생(1939)
△건국대 정외과
△건국대신문 단편소설 <唯情> 당선(1961). 시문학≫에 수필 <父子> 발표(1985).
≪문예사조≫ 시조(1993), 문학평론(顯承論, 2003), 소설(吟味된 자유, 2007) 신인상
△중국조선민족문학대계(전26권) 편찬위원, 한국현대시대사전(자료집필) 편집위원, 한국문예사조문인협회 이사장(2008~2012), 경기대 사회교육원 시창작과 주임교수 역임
△월간문예사조 편집국장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한국자유시인상, 문예사조문학상 대상, 세계시가야금관왕관상 수상
△시집 『그리운 산하』, 『귀향일기』, 『농기(農旗)』, 『세월의 끝』, 『지하철 내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