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시(定型詩와) 자유시(自由詩)는 얼마나 먼 거리에 있으며 서로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원고를 정리하면서 머릿속에 품어온 自問이었다. 시조(時調)의 형식으로 자유시의 이미지를 담을 수는 없을까? 시조의 형식을 우리 고유의 문학 양식이라고 한다. 우리의 양식과 방법으로 우리의 시문학을 다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한 노릇인가. 시조의 형식과 구조에 관하여 진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시조는 시조이어야 한다는 관점에는 찬동하지만 내용과 구조에 대한 고정관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조의 구조와 형식을 파괴하거나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고 현대적 정서와 내용을 시조의 양식에 새롭게 표현하려는 시작 태도를 찬동한다는 뜻이다. 내 오른손을 가만히 바라보면 너무 가깝고 손쉬워서 고마운 생각을 잊고 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시조 양식은 오랜 기간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들을 바꾸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시조 시인들의 몫이다.
나는 時調시인이라는 칭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당신은 “한국 사람이요” 하고 지나는 사람에게 말한다면 얼마나 웃음거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조집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기로 했다. 시를 쓰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시집 한 권 없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격에 맞지도 않다. 나는 시조시라는 이름의 정형성에 별로 구애받지 않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의도성을 실험하기로 했다. 한 주제를 137수의 시조로 묶어 보았고 엇시조의 형식을 비러 자유시의 분방함과 이미지 창조의 비유기법을 실험적으로 시도했다. 앞으로 나는 시조시를 더 쓸 것인가 자유시를 더 많이 쓸 것인가는 나도 모르겠다. 시조 형식이든 자유시이든 형식 그 자체이지 내용이나 주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 이유이다. 꼭 3.4조의 자수에 얽매이지 않고 음보(音步)로써 그 율격(律格)과 내재율(內在律)을 갖추면 되지 싶다.
시조집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는 데는 간단한 이유가 있다. 내가 뒤늦게 문단에 나가면서 시조로 등단했고 집에 딸아이가 자유시로 문단 활동을 하고 있음으로 나는 시조를 다루어 보자고 하는 별거 아닌 의도가 그렇게 되었다. 하여, 첫 번째 시집만은 시조집으로 문단에 인사를 차리는 일이 도리일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1부의 “토말 기행” 편은 여행하면서 다룬 기행 시조이고, 2부의 “생활” 편에서는 내 가족에 대한 정서를 시조로 형상화 한 것이고, 3부의 “그림자” 편에서는 뭐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순수한 시심(詩心) 그것이다. 4부의 “꽃”은 단수의 시편들을 소재나 주제에 관계없이 모았고, 5부의 “그 해 여름” 편은 엇시조 형식으로 자유시에서 취할 수 있는 장점을 실험적으로 시도했다. 6부의 “그리운 산하”는 137수로 된 한편의 작품이다. 137수는 그 나름의 질서가 있다. 山,川,草,木의 1,2,3,4장과 각 장마다 춘,하,추,동 및 유년기, 소년기, 청 장년기, 노년기 등으로 체계적인 내부 진서를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그리운 山河를 형상화했다-
나는 型式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주관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시집 한 권 못낸 사림이 시를 논하다니 하는 핀잔을 받을 때도 나는 편안하다. 핀잔을 받으면서 속으로 웃을 때도 있다. 나는 시에 대한 당당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내 시집의 수적 증가를 꾀하기 위하여 마음에 차지 않는 시를 묶어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시를 더 아끼고 많이 쓰고 싶다. 내가 써야 할 많은 시의 소재와 주제들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때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당돌함도 지니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러 주었듯이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려라” 나는 중학교 때부터 이 말을 새겨왔다. 쓰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는 상태, 그것은 어떠한 심리적 상황일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지금 그 상태에 있다는 것도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다만 많이 쓰고 싶다는 것이다.
이 시집의 서문을 쓰면서 새삼스럽게 내 시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갖는다.
나를 지켜보고 아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출판과 원고 정리를 도와주신 김창직 회장님과 신정모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 김성열, 책머리글 <자서(自序)>
김성열 시인과 필자는 父女之間이면서 함께 文學을 생각하고 시를 쓰는 동반자 관계에 있다. 필자는 시인 아버지와 함께 文學을 논하고 시를 창조하는 운명적인 삶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나의 장래를 예견하고 양육 방향을 설정했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한글을 해득한 이후 처음으로 문장의 뜻을 음미했던 글은 아버지의 자작 동요였다. 그 이후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이 땅의 한 시인으로 태어날 때까지 아버지는 여러 번 나를 거듭 나게 하였다. 아버지의 첫 시집 “그리운 山河”의 해설을 써 보라는 지시(?)를 받고 두렵고 송구스런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반면, 한편으로 즐거운 비명 같은 환희와, 올 것이 왔구나하는 당위성도 느꼈다. 이래저래 뒤엉킨 감정을 가다듬고 해설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김성열 시인은 문학에 대한 열정과 시정신이 치열하고, 그만큼 필자에 대한 문학수업의 지도 방침도 확고하고 준엄했다. 필자가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입학식을 마친 그날 내 전용 원고지를 인쇄하여 리어카에 가득 싣고 집에 왔다. 이 원고지를 다 메우고 난 후에 나와 문학을 이야기 하자고 했다. 그 후 12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그 원고지를 다 못 채우고 출가외인이 되어 이렇게 시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새삼스럽기 그지없다. 아버지는 20대의 대학 시절에 이미 소설을 발표하고 중년에는 시와 수필을 쓰면서 동인활동과 문학단체의 임원을 역임하면서도 문단 데뷔의 통과의례 과정을 밟지 않았으며, 시와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계속해 왔다. 필자가 문예지에 추천 완료 된 그 다음 달에 곧바로 등단 과정을 거쳤으니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계획적이고 확고한 敎育的 信念이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자식이 父母의 정신세계를 뛰어넘을 때 그 家門이 융성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딸이 한 달 먼저 문단에 나갔다고 아버지의 정신세계틀 뛰어넘을 수 있을까만은 외형적인 모티브를 제공함으로써 목표에 이르고자 하는 계기를 주고자 의도적인 智略이었을 것이고, 이로써 딸의 시와 정신세계를 더 넓고 심오하게 터잡아주는 준엄한 게시를 묵언실천으로 나에게 전달하였다.
― 김영희(시인), 서평 <無心한 山野에 꽃피우는 詩心> 중에서
■ 山牛김성열(金性烈) 시인
△전북 남원(인월) 출생(1939)
△건국대 정외과
△건국대신문 단편소설 <唯情> 당선(1961). 시문학≫에 수필 <父子> 발표(1985).
≪문예사조≫ 시조(1993), 문학평론(顯承論, 2003), 소설(吟味된 자유, 2007) 신인상
△중국조선민족문학대계(전26권) 편찬위원, 한국현대시대사전(자료집필) 편집위원, 한국문예사조문인협회 이사장(2008~2012), 경기대 사회교육원 시창작과 주임교수 역임
△월간문예사조 편집국장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한국자유시인상, 문예사조문학상 대상, 세계시가야금관왕관상 수상
△시집 『그리운 산하』, 『귀향일기』, 『농기(農旗)』, 『세월의 끝』, 『지하철 내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