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가는 길이기에 천천히 조심하며 가야 하는 길이 인생이 늙어가는 길이다. 봄철에 씨앗을 뿌려 밭에서 싹이 나오면 크게 실하게 키우기 위해서 솎아내는 어린싹은 그대로 들러리를 섰다가 사라지는 모습이 사그랑이의 운명과 닮았다. 모두 삭아서 못쓰게 되기까지의 여정이 인생이 아니던가. 사그랑이의 처지가 되고 보면 그렇게 되기 이전의 존재는 모두 잊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어떤 일들은 지나친 겸손으로 자기 처지의 결핍을 미화하여 합리화시키는 잔재로 뒹굴기도 한다.
결핍의 늪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사그랑이의 신세가 나 혼자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깊어지는 시간 속에서 하찮은 일들에 머리를 쓰다 보면 거대한 공허의 그늘이 기다린다. 어둠에 겨우 걸린 그믐달 옆에 외로워 더 빛나는 별 하나에 눈물처럼 맑은 그리움이 맺히면, 참담했던 집착의 미로가 거미줄처럼 얽힌다. 돋아나는 추억의 세포 위에 아직도 살점이 남아있는 아픈 세월의 건널목이 있다. 언젠가 무채색이 전부인 물질로 돌아가는 날 삐걱거렸던 무릎의 나약한 옛날도 까맣게 잊어버릴 시간이 기다린다. 원망을 다독이던 무상한 생애의 언저리가 아리다. 그러구러 적토마의 달려가는 발굽의 에너지에서 생기를 얻어 남은 삶을 마디면서도 알차게 살아내야 한다고 여긴다.〈삼국지>에서 여포는 적토마라고 불리는 좋은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조에게 패해 죽게 된 여포의 적토마를 관우를 회유하기 위해 조조가 관우에게 주었다고 한다. 나의 사주에서 보면 오시에 태어난 나는 늙어도 말처럼 달리는 팔자라고 하는데 기왕이면 적토마의 기상을 닮고 싶다. 인간의 나약함이란 너무나 보잘것없다. 인생은 그저 한나절 같지만, 적토마의 발굽처럼 힘있게 삶을 달리고 싶다.
사그랑이가 된 여정에는 튼실한 추억도 있었음이 가끔은 새삼스러울 때가 있다. 한 자락 남은 삶일지라도 그 힘으로 잘 살아가자는 마음을 담아 글로 엮다 보니 열일곱 권째 시집이 되었다. 내 글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이 나를 고무시킨다. 자식 한 명을 더 낳은 마음이다.
― <머리말>
● 초연 김은자
△동국대 행정대학원 졸업(석사)
△《에세이포레⟫수필, 《문예춘추》 시 등단
△문고목문학회 회장. 종로포엠문학회 회장. 문예춘추문인협회 부회장. 강남포에트리문학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역옹인문학당 부학장
△한국전자문학상, 문예춘추수필문학상, 빅톨위고문학상 금상, 현대문학100주년기념문학상, 21세기뉴코리아문학상 최고상, 한국전자저술상, 역옹인문학상, 박경리추모문학상, 석좌시인금관장장,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 세계서법문화대전 동상, 금파미술대전 특선, 앙데팡당아트프라이즈전시회 동상 수상.
△시집 『불꽃은 영원하리』 등 16권
△수필집 『내 귀에 말 걸기』 등 20권
△소설 『어진 땅의 소리 결』 등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