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진경이는 귀향하지 않았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진경이는 미 군정청 요인들과 가까운 사이였다.
훗날 내 친구 세 사람이 한국현대사 최대 비극의 하나인 4·3의 주역으로 등장하리라고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고 운명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아니던가.
조선 민중이 그토록 열망하던 해방은 도적같이 찾아왔다. 삼천리 금수강산 방방곡곡에 감격과 환희의 물결이 거세게 출렁거렸다. 그 물결은 바다 건너 한반도의 끄트머리 제주섬에까지 파문을 일으켰고 일파만파로 번져 갔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축제의 희열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45년 8월 한민족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되찾았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들어와 38도선을 경계로 주둔함으로써 원하지 않는 분단의 벽이 생기게 된다.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제주도에 주둔했던 7만여 명의 일본군은 철수하고 군사시설은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에 건너갔던 6만여 명의 제주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했다.
광복 직후,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의 약칭)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10일에는 제주도 건준이 결성된다. 이어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9월 23일 제주농업학교에서 각 읍·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된다. 인민위원회 조직을 계기로 1945년 말에 이르기까지 청년동맹·부녀동맹·농민위원회·소비조합 등 각종 산하단체가 조직됐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치안 활동에 주력했고 실질적으로 도내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했다.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28일, 군정 업무를 담당할 59군정중대가 도착한 때는 11월 9일이다. 59군정중대는 인력 부족과 정보 부재로 원만한 통치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영향력이 강했던 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기관이나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앉혔으며, 서서히 우익 인사들을 조직화하여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으로 키워갔다.
― <프롤로그> 중에서
●장일홍
△1950년 제주시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중퇴
△《현대문학》 추천완료(1985).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1990)
△한국희곡문학상, 전통연희 창작희곡 공모 최우수상, 월간문학 동리상 수상
△희곡집 『붉은 섬』 『이어도로 간 비바리』 『내 생에 단 한 번의 사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장막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장편소설 『산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