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아버지를 뵈었다. 여러 가지 장치를 달고 호흡곤란을 겪고 있었다. 아버지 모습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으며 아무 의식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 후 내 입술에 꽃이 피었다. 살아가면서 수시로 붙어 살아왔지만 그렇게 무거운 것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못다 한 말을 입술에 달아 주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아프지’말을 하는 것은 아버지가 전하는 말이라고 여겼다. 오랫동안 입술에 붙어 떠나지 않은 영혼의 이름 입술에 핀 꽃도 지고 말았다.
글쓰기를 시작한 시간도 꽤 많이 흘렀다. 글을 쓴다고 밤이 하얗게 새는 줄도 모르고 전념하던 때도 있었다. 밥을 하는 일조차 귀찮아졌다. 글을 쓰고 있을 때는 말도 걸지 말고 일도 시키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당부를 했다. 기를 쓰고 글쓰기를 한 것도 성격이 그렇게 만들었다. 무슨 일을 하면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신념이 마음속에 굳게 박혀 있었다. 글을 쓰다 보면 보람도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면 기억해 주고 격려해 주는 분들이 있어 지금까지 잘 버티어 왔다. 그런 글을 벼 이삭을 줍듯이 모아 창고에 묵혀 두었다. 아직도 풋내가 더 많이 난다. 어눌함이 많고 무르익지 않은 글을 세상 밖으로 내놓으려고 하니 부끄러운 맘이 가득하다.
첫 수필집을 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되새기며 용기를 내어 독자에게 심판을 받는 심정이다. 한 줄의 글이라도 읽고 입맛이 없을 때나 혹시 남자와 여자가 말다툼을 했을 때 약방의 감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야무지게 가져본다.
예쁜 가방 속에 들어가 언제라도 꺼내 보고 싶은 부속품이 되고 싶다. 봄꽃들이 책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내 수필을 계속해서 게재를 해준 합천신문 박황규 사장님, 구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고향에 계시는 9순의 왕 펜이신 어르신들 깅자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예쁜 내 동생 추자도 고맙다. 수필집을 내기까지는 임헌영 교수님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다.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송하춘 교수님께도 감사드리며 ㈜한국산문 선후배 문우님들께 항상 용기와 격려를 준데 대하여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 <머리말> 증에서
● 문경자
△경남 합천 출생
△≪한국산문≫ 수필, ≪국보문학≫ 시 등단
△양천문인협회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합천신문 논설위원
△합천신문에 에세이 연재 중
△자랑스러운 양천문학인상, 한올문학상, 합천신문 논설위원 공로패 수상
△수필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집 『어디 감히 여성의 개미허리를 밟아?』